*초기 미국 의회 기록은 오늘날처럼 완전한 속기록은 아니었다. 1789년부터 1824년까지의 토론은 후대에 '의회 연대기'인『Annals of Congress』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이는 당시 신문 기사, 의원 메모, 비공식 기록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자료였다.
이후 민간 언론인이 의사발언 기록들을 모아 완성한 『Register of Debates』(1824-1837), 속기록 발달로 실질적으로 의회의 발언을 상세하게 기록한 『Congressional Globe』(1833-1873)를 거쳐 1873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Congressional Record』(1873-현재) 체계가 자리 잡았다. 이 모든 자료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디지털 자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 글의 주 자료인 초기 미국 의회 기록은 당시 자료를 다시 정리한 민간 기록물이었기 때문에 본 회장의 분위기, 발언과 반응 등이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초기 미국 기록에는 독일 바이마르 의회 속기록처럼 박수, 웃음, 야유가 체계적으로 기록되지는 않고 장내 소란, 의장의 개입, 의원 간 충돌 등 간단한 서술이 반복적으로 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W.D. Cooper의 역사화(1789). [사진=위키피디아]
세금, 그리고 독립의 여명
1773년 12월 16일 밤.
미국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매사추세츠의 지도자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는 보스턴에 모여 있던 식민지 주민들에게 영국 총독이 차를 실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선박을 돌려보내라는 시위대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외쳤다.
이에 분노한 수십 명의 식민지 주민들이 배가 정박하고 있는 항구로 집결했다. 그들은 바로 다트머스(Dartmouth), 엘리너(Eleanor), 비버(Beaver)호 등 세 척의 선박에 올라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가 담긴 342개의 상자를 바다에 버렸다.
오늘날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단순한 조세 저항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세금을 부과할 권한을 가지는가, 시민은 어떤 정부에 복종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통치 정당성을 놓고 벌인 충돌이었다.
보스턴 사건에서 보듯 미국 건국의 역사는 세금과 직결되어 있다. 과중한 세금은 곧 압제의 동의어였다.
역사학자 벤저민 카프(Benjamin L. Carp)가 쓴 '애국자들의 도전'(Defiance of the Patriots, 2010)이라는 저서에서 보스턴 차 사건을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영국 제국의 통치 정당성 자체에 대한 공개적 도전으로 설명한다.
미국 독립운동 지도자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초상화(John Singleton Copley). [사진=위키피디아]
실제로 당시 바다에 버려진 차의 가치는 약 9600파운드에 달했다. 단순 물가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화폐가치로 20~30억 원 규모밖에 되지 않지만, 당시 영국 재정 구조 속에서 그 의미는 훨씬 더 컸다.
1770년대 영국군 일반 병사의 연봉이 약 7~8파운드 수준(18세기 후반 대영제국 보병(Infantry Private)의 공식 일당은 8펜스(Pence)였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식민지 주민들이 바다에 던져버린 차는 1200명 이상의 영국군 병사 1년 급여에 해당하는 규모였다(Unger, 2011; Labaree, 1964).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상징성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프랑스와 벌인 7년 전쟁(1756–1763) 이후 급증한 국가 부채와 북미 주둔군 유지 비용 때문에 심각한 재정 압박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런던 정부는 북미 식민지 방어 비용의 일부를 식민지 주민들이 부담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바로 그 재정 논리 속에서 인지세법(Stamp Act), 타운젠드 관세(Townshend Duties), 차세(Tea Act)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Bailyn, 1967; Middlekauff, 2005).
당시 버지니아주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는 1765년 '버지니아 결의안'(Virginia Resolves)에서 식민지 주민들도 영국 시민과 동일한 과세 원칙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매사추세츠의 제임스 오티스(James Otis)는 "대표 없는 과세는 폭정이다(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is tyranny)"라고 말했다.
이후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표현은 북미 식민지 저항 운동의 핵심 정치 언어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세금은 미국 독립전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민감한 단어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초상화(Gilbert Stuart). [사진=위키미디어 공용]
1776년 여름,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주의사당(State House)에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모였다. 이들은 영국과의 완전한 결별 여부를 놓고 찬반으로 대립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1776년 7월 4일 독립 선언서가 채택되었지만, 미국의 독립은 선언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약 5년에 걸친 독립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재정 사정이 미국 독립전쟁을 힘들게 만들었다.
당시 13개 식민지 주 대표들이 모인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영국의 과도한 세금 폭정에 저항하며 탄생한 임시 연합체였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새로 만든 대륙회의에 직접 세금을 제정하고 강제로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당시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반복적으로 병력 부족과 재정난을 대륙회의에 호소했다.
1777년 12월 23일, 혹독한 겨울 속 밸리 포지(Valley Forge)에 주둔 중이던 워싱턴은 대륙회의에 보내는 편지에서 당시 미군의 절박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늘 현재 최소 2873명의 병사가 맨발이거나 제대로 된 군복조차 없어 전투에 나설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We have this day no less than 2,873 men in camp unfit for duty because they are barefoot and otherwise naked (George Washington to Continental Congress, December 23, 1777)."
독립전쟁 기간 재정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프랑스 대사로 파리에 파견되었던 벤자민 프랭클린과 훗날 제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 등의 끈질긴 외교적 노력 덕분에, 영국을 견제하려던 프랑스 왕정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현금 차관과 군사 장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고, 네덜란드 은행가들로부터 얻어낸 해외 차관 역시 미국의 무너진 재정을 간신히 지탱해 준 인공호흡기였다.
The Rhetorical Foundations